윤기향 교수님

-현대 과학 정신과 기독교 신앙-

요즈음 세계적인 한 물리학자의발언이 뜨거운 이슈가 되어 곳곳에서 논쟁과 반응을 불러 일으키고 신문 지상에는 여러 의견들로 분분하다. 그의 이름은 스티븐 호킹(Steven Hoking)으로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천체 물리학자이며 석학으로 불리운다. [위대한 설계](The Grand Design)라는 저술을 통해서 그는 창조주 없이 물리학 법칙만 가지고도 우주를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단다. 우주를 창조한 대 폭발인 빅뱅(Big Bang) 은 신의 개입으로 이뤄졌다기 보다는 중력의 법칙에 의해 발생한 것으로 우주는 무(無)로부터 스스로 창조됐다는 주장이다. 이 주장은 “신(神 )이 우주를 창조하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 지금 영국을 비롯한 많은 유신론적 과학자들이 호킹에 대해 반발을 하고 나서고 있다. 그 중에 ‘과학적 신학’의 영역을 개척해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알리스터 맥그래스 영국 킹스 칼리지 교수는 지난 9월 12일 국민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물리학 법칙 자체는 무(無)에서 유(有)를 만들 수 없으며, 중력 법칙이나 물리학 등은 어떤 조건에서 발생한 결과를 설명해 줄 뿐이지 그 법칙 자체가 특정세계를 창조할 수는 없다… 호킹의 분석은 실망스럽게도 가장 중요한 점에서 약한 점을 보여 주었는데, 그는 우주 설계자와 자연 법칙을 혼동한 것이다.”라고 하면서 호킹의 주장을 정면 반박했다.

과학이 신(神)의 존재를 증명을 할 수 있는가?

과연 과학이 하나님 존재를 설명할 수 있을까? 과학이 종교를 부인하는 것은 위험하다. 나아가 과학이 종교를 무시할 경우 그 관점은 협소해져 우리를 극히 위험하고 잘 못된 길로 이끌 수 있다. 종교도 마찬가지로 과학의 역할을 무시했을 때 인간의 정신 세계를 억압했던 위험 천만의 암흑 시대가 분명 있었다. 본인은 호킹의 저서를 읽어 보지도 않았고, 물리학에 대해서는 문외한이기에 그의 이론에 대해서 설명을 할 수도 없다. 그래서 그에 대해서 심도 있는 비판도 할 수 없다. 하지만 그의 발언은 과학자의 입장에 보아서도 한계를 넘어섰다고 본다. 사람들은 무턱대고 세계적인 학자의 말이라면 그의 말에 경청을 하고 민감한 반응을 보이곤 한다. 그는 단지 과학자 일 뿐이다. 그의 주장은 계발되고 있는 과정의 이론이다. 그의 말은 진리가 아니다. 성경 시편 말씀은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14:1)라고 엄중히 선언한다.

요즈음 현대인들은 종교와 도덕의 가치관 보다는 과학 지식을 더 신뢰하고 신봉하고 살아가고 있다. 그 이유는 현대시대가 물질 문명 혹은 과학 문명이라고 부르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과학을 거역하는 모든 종교적 발언은 유치한 것이 되었으며, 비 과학적이란 단어는 무지와 미신으로 간주 되었다. 과학적 사고방식이 절대적 권위를 가지고 있는 현 시대에 무신론 과학자들이 쏟아 놓는 주장과 이론들이야 말로 절대 군림하는 종교가 되어 버렸다. 이것에 대한 심각한 문제점은 무엇인가? 그에 대한 답은 창조주 하나님을 향하여 비판과 공격을 일삼을 수 밖에 없는 무신론적인 철학 사상이 갑자기 나타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범위상 근대에 영향을 끼쳤던 사상에 대해서만 잠깐 고찰해 보도록 하겠다.

일반적으로 현대 지식인들은 대개 이론 만을 추구하며 살아가기 때문에 확신을 이성적으로 요구한다. 특별히 철학적인 지식인들은 관념의 유희에 더욱 빠지기 쉽다. 진리에 도달하는 길도 더 많은 과학적 지식을 소유해야지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철학적 이론가들은 과학적인 사물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가진다. 자연의 본질이 무엇인지? 우주의 본질은 무엇인지? 그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연구를 한다. 끝없이 펼쳐지는 우주와 그 세계에 대해서 궁금증을 가지고 질문들을 던진다. 왜? 어떻게? 끝이 없는 질문들의 연속이 계속된다. 그런데 종교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신앙과 구원,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진지하게 알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들은 철학적인 사고로 학문을 연구한다. 그들은 이성과 판단, 그리고 분별을 가지고 자연의 이치를 탐구한다. 과학도 여기에서 탄생하는 것이다.

근대 철학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데카르트( Rene Descartes, 1596-1650)의 철학의 명제가 “이성(理性)이 최고야!”의 유행을 만연 시켰다. 그 유명한 명제는 코기또 에르고 숨( Cogito ergo sum)이다. 이 말은 라틴어로 ‘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I think, therefore I am)라는 뜻이다. 이성 즉, 지성(知性)을 가지고 생각하고, 사고하고, 생각하고, 사고하는 주체를 으뜸으로 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는 프랑스의 천재적인 수학자로서 명성을 날렸을 뿐 아니라 과학의 대가였다. 철학에 있어서 그는 ‘근대 철학의 아버지’로 불리울 정도이다. 본인도 요즈음 현재 미국의 수학자로서 명성을 날리고 있는 아미르 악첼(Amir D. Aczel) 박사의 저서 [Descartes’Secret Notebook]를 통해서 데카르트의 사상과 그가 수학계에 끼친 영향에 대해서, 특별히 현대 과학 발명의 업적 등등을 통해서 다시 그를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되었다. 하지만 그의 철학적 사상을 근본적으로 지지하지 않는다. 그는 물질과 정신의 2원론을 주장하면서 물질 세계는 정신세계에 비해 열등하며 인간이 마음대로 분석하며 사용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능하게 했다. 그는 우주의 모든 실체를 ‘생각하는 실체’와 공간을 차지하는 ‘물질적 실체’로 나누었다. 그래서 전 우주에 붙여졌던 자연(自然)이란 이름이 물질계로 한정 되면서 과학적 연구의 대상이 되게 된다. 물질만이 공간을 차지할 수 있으며 물질 만이 측량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주는 수학의 적용 대상이 되었다. 데카르트는 수학을 통해 확실한 철학 지식을 체계화 시키려고 했다. 오늘날 현대를 물질 문명 혹은 과학 문명의 시대로 명명하는 이유도 여기에서 나온다고 본다. 그는 하나님의 존재 증명도 과학 지식으로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자칭 무신론자는 아니었다. 기독교 카톨릭에 속해 있었다. 그렇지만 위에서 소개했던 악첼 박사의 책을 보면 그는 유대교 신비주의의 영향을 받은 장미 십자가 형제단(the Brotherhood of the Rosy Cross) 출신의 신비주의 수학자 요한 파울하버(Johann Faulhaber)와 교제를 하면서 한 때는 카발라 사상에 깊이 심취해 있었다. 복잡한 수학 공식 같은 지식을 사용하여 신 지식을 체험하게 하는 단체였다. 데카르트는 천문학자 요한 케플로(Johann Kepler)와도 친분을 나누었는데, 그도 “물질이 있는 곳에 기하학이 있다.”는 유명 발언을 했지만 뒤론 사실 점성술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이런 예를 직접적으로 드는 이유는 자연 과학을 하는 배후에는 때론 역설적인 위험성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 역설은 과학 지식도 언제든지 미신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엄연한 사실이다. 천문학과 점성술은 동전의 양면과 같이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아 왔다는 사실이 그 한 예이다. 그런 과학자들을 열거 하라면 끝도 없다고 할 수 있다.

철학자들이나 천체를 연구하는 과학자들은 때론 신을 찾기 위해서 복잡한 철학 체계를 사용한다든지 아니면 온 우주를 찾아 헤멘다. 육신의 눈으로는 부족하여서 큰 망원경, 작은 망원경을 설치해 놓고 찾아 헤멘다. 그러다 요즈음 와서는 여러 개의 태양계를 발견하기도 하는 업적을 이루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을 절대 발견할 수 없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태복음 5장 8절) 하나님은 마음이 순수하지 않으면 볼 수가 없다. 반대로 아무리 수 십 개의 현미경을 가지고 자세히 보려고 해도 세균들은 볼 수 있지만 하나님은 못 본다. 진리를 알려면 겸손하게 지식을 내려 놓아야만 한다. 이성과 사고 만을 가지고는 절대로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 종교는 학문이 아니다. 종교는 철학도 아니다. 그러므로 신에 대한 토론은 절대적으로 무의미하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세기 1장 1절)라고 선언하신 그 말씀대로 그분의 존재에 대한 신앙은 그저 믿고 받아들이는 데 있다. 철학의 방법은 회의(懷疑)와 의심이다. 그러나 신앙은 반대로 신뢰하는 마음이다. 무신론자들이 외치는 이성과 판단은 시작부터 교만이다. 실존주의 (實存主義) 철학의 문을 연 덴마크의 철학자 이면서 신학자였던 키에르케가르(Soeren Kierkegaard)가 ‘나는 데카르트를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고 했던 속설이 던져 준 의미는 심장하다. 이성을 뛰어 넘는 신앙의 실체를 간파했던 그는 이성주의 철학자들을 혐오했다. 그는 ‘신앙은 절대자와의 고독한 개인의 만남이다.’라고 외쳤다. 저 유명한 명제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인간은 땅에 있다.”고 한 말 또한 하나님은 창조자 이시고 인간은 피조물이라는 사실 앞에 겸손히 침묵하라는 충언이다. 그는 [이것이냐, 저것이냐]라는 책에서 “경험 철학자들은 신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생각을 안 하면서 바보처럼 자연에 만 홀딱 반해 바라보고만 있다.”라고 꼬집고 있다.

정신은 아직 신비의 영역으로 과학의 연구 대상이 되지 않고 있다가 데카르트 분깃점으로 해서 스피노자와 라이브니찌히를 거쳐, 영국의 철학자 죤 로크에 이르러서는 형이상학적으로 정신과 물질이 동일화 되었다. 정신 현상을 해부학적 방법으로 분석하기 시작했다. 인간은 더 이상 신비로운 존재가 아니었다. 하물며 신의 존재도 역시 분석의 대상이 되고 말아 버린 것이다. 다아윈의 진화론은 설상가상으로 인간을 동물 선상에 놓았을 뿐 아니라, 인간의 정신 현상도 생물적 과정의 부산물로 보았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도 아니고 단지 동물에 불과 하다는 이론 속에서 인간에게 있는 신적인 요소는 완전히 제거 되었다. 그와 함께 신의 존재는 마땅히 부인되는 무신론의 시대가 활짝 열리게 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런 시대에 우리는 좋은 과학자들과 철학자들이 절실히 필요하다. 여기에 ‘좋은’이라는 수식어는 적어도 신을 믿는 근본적으로 겸손의 양식이 있는 학자들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그런 의미에서 한 사람을 소개하면서 결론을 지으려 한다.

그는 바로 파스칼( Blaise Pascal,1623-1662)이다. 그는 데카르트와 같이 그 당대 최고의 천재로 추앙 받았던 수학자였다. 그는 물리학자였으며, 그는 동시에 철학자였다. “신을 직관하는 것은 심정(心情)이지이성이 아니다. 이것이 곧 신앙이다.”라고 말했던 그에게 하나님을 향한 신앙은 정신의 질서와 이성의 질서를 뛰어 넘는 어떤 확신을 의미했다. 속설에 의하면 그가 평생 동안 자신의 옷, 오바 코트에 평생 박아 가지고 다니던 메모가 있었는데 그 메시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는 철학자들의 하나님을 원치 않는다. 나는 다윗과 아브라함과 야곱의 하나님을 원한다.”

그는 39세의 젊은 나이로 생애를 마치고 세상을 떠나면서 그가 남긴 메모식의 유고는 그 유명한 [팡세](Pensees)인데 주옥 같은 신앙의 명상으로 가득 차 있다. 철학자로서의 그의 글이 현대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커서 한번 인용해 본다.
“인간은 무한의 무, 위대함과 비참함 사이에 부동하는 중간자이다. 광대무변한 우주에 비하면 거의 하나의 점과 같다. 한 줄기의 갈대처럼 약한 존재이다. 그러나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이다.’ 공간에 의해 우주는 나를 휩싸고 하나의 점으로써 나를 포옹한다. 그러나 사고에 의해 나는 우주를 휩싼다. 여기에 인간의 존엄이 있다. 인간은 위대한 동시에 비참하며, 자신이 비참함을 알기 때문에 위대하다.”

철학자들은 이 이율배반을 결코 해결하지 못한다. 자기 비참함을 모르는 채, 자기 힘으로 신을 완전히 알려고 하다가 자만에 빠지기 십상이다. 신앙은 삶 속에서 하나님의 현존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하나님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사실 만은 알기에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가 아니라 “나는 믿는다. 그러므로 존재한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크레도 에르고 숨!(Credo ergo sum) “나는 믿는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