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마고 데이(imago dei)는 라틴어로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뜻이다. 무엇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일까?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이다. 성경 창세기 1장 27절을 보면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고 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자기와 비슷한 모습으로 자기를 닮은 존재로 지으셨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동물은 하나님의 형상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일까? 사람도 하나님이 자연에서 지으신 피조물이기에 동•식물적인 성질이 있다. 그렇다고 해서 동식물이 하나님의 형상인 것은 아니다. 사람이 동물이라고 해서 원숭이가 조상이 될 필요는 없다. 아메바는 더더욱 아니다. 사람은 흙의 형상도 있지만, 하나님의 형상도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은 무엇일까? 그것은 사람이 신(神)적 존재로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며 살도록 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며 산다는 뜻은 무엇일까? 이 말의 뜻은 하나님 같이 생각하고, 하나님 같이 느끼고, 하나님 같이 행동하라는 의미일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God’s Image)이라면, 하나님의 형상이란 뜻은 무엇일까? 하나님의 형상은 선(goodness)과 미(beauty)와 진리(truth)로 표현될 수 있다. 선(善)이 도덕의 문제를 표현한다면, 진리(眞理)는 종교의 표현이다.그 중에 미와 아름다움의 형상은 예술로 표현된다. 예술가야 말로 창조 사역에 있어서 가장 하나님의 형상에 근접한 사람들인지도 모른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God’s Image )이라면, 예술가는 이미지 메이커(image maker)가 된다. 예술가는 창조사역으로 하나님과 함께 동역 한다. ‘동역’의 의미 그것은 바로 예술가의 작품 활동이다. 기독교 문화 사역을 하면서 예술과 예술가의 중요성에 관심을 기울이는 일은 매우 시급한 일이다. 그 시급성을 한번 논해 보자.
예술적 미의 추구, 그 아름다움을 찾는 노력에 있어서는 그 관심이 캐톨릭이 신교 보다 더 앞선 듯하다. 신교는 그림에 있어서는 배타적이다. 신학적으로 성화 숭배로 정죄된 상태이기에 그 문제에 있어서 주저 주저하는 동안에 캐톨릭은 계속 미(beauty)에 대해 깊은 강조점과 관심을 가지고 예민하게 대처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음의 글은 라비 차카리아스 국제 사역(Ravi Zacharias International Ministries) (참고 www.rzim.org)에서 소개한 글이다. 번역을 요약하여 소개하면, 2009년 11월 21일 베네딕트 교황은 500백 명의 예술가들을 로마 바티칸 시스턴 성당(the Sistine Chapel)으로 초청하였다. 그날에는 신앙심이 깊은 예술가에서부터 비 신앙인까지 각양각색의 여러 미술계의 대표 260여 명이 참여 했다. 이 이벤트는 45년 간 행해져 왔는데, 교황 바오로 6세(Paul VI)가 예술가들에 대한 교회의 자세에 대해서(the church’s attitude towards artists) 그들을 변호하기 위해서 시작했다. 그 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hn Paul II)에 의해서는 [예술가들에게 보내는 편지] (Letter to Artists)로 10년간을, 그 후 교황 베네딕트 (Benedict)도 예술가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다음은 편지 내용이다.
“아름다움과 소망 사이 에서의 심오한 결속”은 교황 바오로 6세가 1965년 12월 8일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결과 예술가들에게 보내는 편지 속에 나타난 메시지의 핵심적인 내용입니다.
바오로 교황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여러분들이 진정한 예술의 동역자라면, 여러분들은 바로 우리의 동역자들입니다.’ 그는 계속해서 덧붙이기를, ‘현 세상이 절망 속으로 침잠되지 않기 위해서는 미(beauty)를 절실히 요구하는 삶을 살아야 할지도 모릅니다. 진리(truth)와 마찬가지로 미(beauty)는 인간의 마음 속에 기쁨을 가져다 주며, 부식하는 시대를 저항하도록 하는 순수한 열매입니다. 여러분들의 손으로 만든 작품을 통해서 모든 미는 세대와 세대를 연결 시켜주며, 감탄 속에서 하나로 연합 시켜 줍니다. 여러분들은 현 세상에서 미의 후견자가 된다는 사실을 꼭 기억 하십시요(Remember that you are the custodians of beauty in the world).”
교황 바오로 6세의 교서이지만 현재의 교황의 입을 통해 전통으로 이어지는 예술가들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에 깊은 도전과 감동을 받았다. 왜 캐톨릭은 예술에 대해서 그렇게도 지대한 관심을 가지는 것일까? 사람은 빵 없이는 절대로 살 수는 없는 존재이다. 사람은 또한 과학의 지식 없이도 살 수 없다. 그러나 아름다움이 없는 삶은 더더욱 의미가 없다는 엄연한 사실을 그들은 역사 속에서 예술인의 진정한 역할을 그 누구 보다도 더 직시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이 사실은 분명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21세기는 이제 더 이상 사상의 대립 시대도 아니고, 경제의 시대도 아닌 문화와 예술의 시대라고 한다.
그렇다면 과연 문화 속의 예술이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이세상 사람들에게 미의 욕구를 충족시켜줄 수 있는 것일까? 예술의 삶이 사람들에게 진정한 기쁨과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는 것일까? 더 근본적인 질문을 해 본다면, 예술의 삶이 우리에게 진정으로 의미 있는 삶의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가?이다.
예술의 세계는 반대로 우리를 자주 충동과 자극으로 이끌어 우리를 속인다. 때론 피상적으로 우리를 분명 눈 멀게 한다. 예술은 진정한 자유의 외침을 토로하면서 예술가들로 하여금 목적 없이 유리방황하게 한다. 예술은 우리를 쾌락의 노예로 전락시키면서 우리를 타락의 구렁으로 몰아 넣는다. 예술은 매혹의 옷을 입고 행복과 소망을 약속하면서 우리를 현혹시킨다. 그리하여 우리의 욕망에 불을 지펴 놓고는 우리의 의지를 사로 잡아 소유한다. 그 다음에는 수 많은 사람들을 유행의 방법으로 전염시켜 통치하기 까지 한다. 그래서 예술은 도발적인 범죄의 온상이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문화와 예술은 근본적으로 내용에 있어서 사상과 철학이 중요하다. 그 중에서 종교의 역할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때론 종교가 예술을 억압하고, 잘못 인도하는 오류도 범하지만, 예술의 길에 등불과 지침이 되어준다. 진리로서 예술의 내면 세계에 영성을 일으켜 주어 풍성함을 주며, 동시에 예술가의 창조성에도 지대한 영향을 준다. 바로 CCTP가 해야 할 사명은 성경이 보여 주고 있는 스토리(story), 형상(image), 모습(figure), 비유(parables), 상징(symbol), 존재(personality)등등을 예술가들이 해석할 수 있도록 도와 주는 일이다. 그 다음 주제를 잡아 끌어 내도록 도와 주고, 진리 안에 내재된 영감(inspiration)을 받도록 하는 일이다. 진리의 속성인 영원성을 향하여 작품을 끊임없이 창조하게 하는 일이다. 세대와 세대를 이어 영원한 진리의 안에서 찬란히 품어내는 예술성이 영원토록 영향력을 줄 유산으로 남게 하는 일이다.
마지막으로 위에서 인용했던 라비 차카리아스 국제 사역 매거진 글을 인용하면서 글을 맺는다.
“크리스찬 예술가들이여! 여러분들의 예술 작품을 통해서 그대들은 온 인류의 소망을 주는 예수그리스도의 전령(heralds)이며, 증인(witnesses)입니다. 여러분들은 역사 안에서 영원한 미를 향해서(towards infinite Beauty) 돌진하는 순례자 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